Saturday, September 20, 2014

단돈 30만원 들고 28개월간 5대륙 10개국 돌아

  • [곽아람 기자의 캔버스] 단돈 30만원 들고 28개월간 5대륙 10개국 돌아… 獨청년 쾨르너의 '특별한 여행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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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4.09.20 0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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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두 번 태어난다… 어머니 뱃속에서, 또 한 번은 여행길에서

괴테·잡스도 떠났던 '수련여행'
중세 匠人들 기술연마 본떠 숙식 제공 '일하는 나그네'로
각국서 다양한 직업 체험… 책 '저니맨', 獨 사회서 열풍

훌쩍 떠나라, '당신'을 찾아
많은 이가 떠나길 원하지만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야
좋은 직업 주어진다 믿어… 망설이다간, 모두 놓친다

상하이에선 대규모 건설 현장의 건축 보조, 말레이시아에선 쿠알라룸푸르 디자인 위크 국제홍보대사, 인도에선 높이 8m짜리 수직 정원 설계 담당,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요트 회사 웹디자이너, 에티오피아에선 국립미술관의 사진전 홍보, 쿠바 아바나에선 독재 정권에 시달리는 현지인들의 인터뷰 영상 촬영….

이 일관성 없는 일들은? '멀쩡한' 독일 청년이 2년 4개월간 세계를 떠돌며 해본 것이다. 파비안 직스투스 쾨르너(33)씨는 2010년 1월 단돈 200유로(약 30만원)를 들고 세계 여행을 떠났다. 그는 중국, 말레이시아, 인도, 이집트, 에티오피아, 호주, 미국, 쿠바, 도미니카 공화국, 콜롬비아 등 10개국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그 여행 이야기를 묶어 '저니맨(Journeyman)'이란 책을 냈다. 책은 베스트셀러가 됐고, 독일인들의 마음에 여행에 대한 열망을 불 질렀다.
2011년 쿠바 아바나를 방문했을 때. 쾨르너가 자전거 택시 위에 앉아 시가를 물고 있다.
2011년 쿠바 아바나를 방문했을 때. 쾨르너가 자전거 택시 위에 앉아 시가를 물고 있다. 그는“유럽과 미국의 젊은이들은 지금도 체 게바라의 얼굴이 찍힌 티셔츠를 입고 다니며 아무렇게나 자유와 혁명을 이야기하지만, 정작 쿠바의 현지인들은 자유는커녕 성냥 하나 살 수 있는 기회조차 누리지 못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는 또“관광은 밝은 빛을 보는 여정이지만 여행은 빛 뒤에 가려진 어둠까지 봐야 하는 여정이다. 그래서 관광객이 단지 눈으로만 즐거워할 때 여행자들에게는 가슴으로 아파할 기회가 주어지며, 그것이 곧 삶의 화두로 이어진다”고 했다. / ⓒ Daniel Castro
그런데 그가 했던 여행, 배낭여행도 관광도 아니었다. 요즘 흔한 힐링 여행도 아니었다. '수련 여행'이었다. 일하면서 하는 여행이라고 할까. 그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베를린행 비행기에 올라 지난 9일 쾨르너를 만났다. 지하철로 찾아가긴 힘들다기에 택시를 타고 찾아간 동네는 한마디로 '전위적'이었다. 그라피티(graffiti·스프레이 페인트로 그린 낙서)로 뒤덮인 건물들은 폐허 같았다. 색색 낙서투성이인 4층짜리 건물의 초인종을 누르자 2층에서 황갈색 머리와 푸른 눈의 사내가 청색 남방에 블랙진 차림으로 내려와 문을 열어주었다. 소란스러운 외관과는 달리 간소한 가구와 책, 사진으로 장식된 집 안은 깔끔하고 단정했다. 거실의 나무 탁자에서 레몬생강차가 담긴 사발만 한 찻잔을 앞에 두고 마주 앉았다.

―어떤 여행을 했기에 독일에서 그토록 화제가 됐나.

"직업인으로서 자신을 성장시키기 위한 '수련'으로 한 여행이었다고 할까."

그는 현지에서 구할 수 있는 일을 닥치는 대로 하며 전공과 관련된 '실무 경험'을 쌓았다. 그의 전공은 실내건축학. 여행 비용은 독일서 하던 웹디자인 아르바이트를 계속하며 충당했다. 여행지에서 하는 일은 '수련'을 위한 것일 뿐 돈을 벌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게 그의 원칙이었다. 일해준 대가로 숙식만 제공받고 보수는 받지 않았다. 여행 과정은 '저니맨 이야기(Stories of A Journeyman)'라는 블로그에 기록했다. '저니맨'은 '도제 수업을 마쳤으나 아직 장인이 되지 못한 직공'을 뜻한다.

그는 새로운 여행지에 도착할 때마다 이 말로 '여행'을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뭐 없을까요? 돈은 필요 없습니다. 숙식만 제공해주시면 됩니다."

지난해 11월 독일에서 발간된 그의 여행기 '저니맨'은 독일 대표 일간지 디 벨트를 비롯한 20개 매체에 소개됐다. 슈피겔 베스트셀러 논픽션 분야에 35주간 올라 있었다. 현지 반응은 이랬다. "시간도 없고 돈도 없어 여행을 못 간다고? 이 책을 읽으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놀랍도록 솔직하고 가슴 깊이 공감되는 색다른 여행기. 여행 세포를 깨우고 싶은 모든 사람을 위한 책"…. 책은 오스트리아, 스위스에 이어 최근 한국에서 출간됐으며, 중국어·영어·스페인어판 출간도 앞두고 있다.

중세 '수련 여행'을 벤치마킹하다

괴테의 '파우스트'에 따르면,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 괴테의 나라에서 나고 자란 이 독일 청년에게도 어김없이 '방황'이 들이닥쳤다. 26세 때인 2007년 대학을 졸업했는데, 당장 취직하기보다는 여행을 하고 싶었다. 1년 전 라오스 여행의 강렬한 기억을 지울 수가 없었다.

"고깃배를 몰고 강을 건너는데 갑자기 장대비가 쏟아졌다. 배가 급류에 휘말렸고, 금방이라도 뒤집힐 것 같았다. 네 시간 동안 노를 저으며 사투를 벌였다. 거의 탈진했을 무렵 기적처럼 물결이 잔잔해졌다. 스스로를 죽음에서 구해낸 그 경험을 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세상 곳곳을 탐험하는 '진짜' 여행을 하면서 더 많은 경험을 해보고 싶었다."

―지구상의 거의 모든 나라에서 청년 실업이 큰 문제다. 유럽에서 청년 실업률이 가장 낮은 독일(7.8%)의 팔자 좋은 젊은이라서 '취직은 나중에'라고 말할 수 있는 것 아닐까.

"국가 경제가 안정됐다고 국민의 행복이 보장되던가. 사람들이 원하는 건 행복한 삶이지 안정된 삶은 아니지 않은가. 물론 모험과 재미를 포기하고 안전한 길을 가는 사람도 많다. 이해한다. 내가 여행 간다고 하니 친구들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를 여행으로 탕진하겠다니 제정신이냐'며 뜯어말리더라. 하지만 그때 내게 필요한 건 당장의 '결정'이 아니라 도전이었다. 그렇다고 사회의 테두리 밖으로 벗어나고 싶진 않았다. 여행을 하면서도 계속 디자이너나 포토그래퍼로 일하고 싶었다. 그래서 프리랜서로 일하며 여행 준비를 했다."

―여행하면서 일도 한다고? 그게 가능할까. 여행을 망치든지 일을 제대로 못 하든지 둘 중 하나일 것 같은데.

"그럴 때 전통이 답을 주더라. 중세에 '수련 여행자'가 있었다. 중세 독일에서 장인(匠人)이 되려면 기술 교육이 끝나고 얼마 동안 여행을 해야만 했다. 한 도시에서 다른 도시로 옮겨 다니면서 여러 작업장(workshop)을 거치며 경험을 쌓는 것이 숙련된 장인이 되기 위한 요건이었다. 인간은 두 번 태어난다. 한 번은 어머니 자궁에서, 또 한 번은 여행길 위에서. 어디 중세 시대에만 그렇던가. 괴테는 이탈리아 여행에서 '파우스트'의 영감을 얻었고, 스티브 잡스도 인도 여행에서 돌아온 후 혁명적 아이디어를 내놓지 않았나."
쾨르너의 수련 여행 중 모습. 중국 상하이 건축 현장에서 첫날 일하는 모습
쾨르너의 수련 여행 중 모습. 중국 상하이 건축 현장에서 첫날 일하는 모습
쾨르너의 수련 여행 중 모습. 인도에서 수직정원을 설계할 때
쾨르너의 수련 여행 중 모습. 인도에서 수직정원을 설계할 때
―'수련'엔 엄격한 규율이 필요한데.

"중세의 수련 여행자들에게도 규율이 있었다. 이를테면 여행 중 반드시 일을 하며 그 대가로 숙식을 해결해야 한다든가, 여행 일지에 각 도시의 시장으로부터 그곳을 실제로 방문했다는 것을 증빙하는 도장을 받는다든가 하는. 중세 수련 여행자들은 귀에 구멍을 뚫고 순금 귀고리를 했는데, 이는 목수 등 각 직업군을 상징하는 특별한 상징이었다. 규율은 엄격했다. 만일 어떤 수련자가 규율을 어기면 다른 수련자들이 그의 귀고리를 뜯어냄으로써 귀의 일부를 자르는 형벌을 가했다. 귀고리를 뜯긴 자는 길드에서 배척되고 더 이상 일할 수 없었다. 요즘에도 독일에선 똑똑하긴 하지만 규율을 지키지 않는 사람을 '슐리초어(Schlitzohr)'라고 한다. '귀를 자르다'는 뜻이다."

"독일식 효율성이 나를 괴롭혔다"

쾨르너는 첫 여행지로 중국 상하이를 택했다. 지도교수가 상하이의 옛 동료와 연락해 그곳 건축사무소를 소개해줬기 때문이다. 상하이에 도착해 첫 일자리 면접을 가보니 담당자는 출장 가고 없었다. 임시 숙소에서 닷새를 기다려 면접을 봤다. 건축물 리노베이션 프로젝트의 실습생 자격으로 합격했다. 이렇게 진짜 수련 여행이 시작됐다.

―건축주가 록펠러그룹이었다는데 도대체 무슨 일을 했나.

"100년 된 영국 대사관저와 이웃 건물을 5년 안에 개·보수해 화랑이 있는 쇼핑센터로 바꾸는 프로젝트였다. 하긴 록펠러가 아니면 누가 그 역사적 건축물을 대규모 쇼핑센터로 바꾸려고 할까. 내 전공은 대규모 건축과는 거리가 멀어 좀 신경 쓰였는데, 공사반장이 '아무 상관 없다. 여긴 중국이니까'라고 하더라."

―수련 여행 첫 단추를 끼우는 단계였는데, 실망 좀 했겠다.

"처음에야 그랬지. 머나먼 아시아까지 와서 록펠러 그룹을 위해 타일이나 세고 있다니,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나 싶더라. 그런데 또 한편으론 나도 어쩔 수 없이 '효율성'에 죽고 사는 독일인인가 싶었다. '평생 헌신할 진짜 직업을 가려내기 위한 시도'를 하겠다면서도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그저 빨리 깨달음을 얻고 싶어 안달했다. 그런 조바심과 목표 지향적 사고방식을 내려놓으려고 떠난 길에서 여전히 그 한계에 붙들려 운동경기하듯 여행을 하고 있었다고 할까."

그때 떠오른 게 여행 떠나기 전 지도교수가 해 준 말이었다. "흔히들 지름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긴 우회로일 수도 있지. 반대로 우회로처럼 보이는 게 오히려 진짜 지름길일 수도 있고."

그는 "독일의 진짜 신(神)은 '효율성'이고, 나는 그 신도"라고 말한다. 어딜 가나 그는 속속들이 독일인이었다. 집 떠나니 바로 그 독일인다움이 그를 힘들게 했다. 효율성을 최고로 치는 사람에게 여행이 편하고 재미있을 리가 없었다.
쾨르너의 수련 여행 중 모습. 말레이시아에서 모델 선발대회 심사위원으로 일할 때.
쾨르너의 수련 여행 중 모습. 말레이시아에서 모델 선발대회 심사위원으로 일할 때.
2011년 호주 퀸즐랜드에서 휴식 중인 쾨르너.
2011년 호주 퀸즐랜드에서 휴식 중인 쾨르너. 그는 호주에서 보름 넘게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상심하고 있던 중 우연히 만난 원주민 남성으로부터“인생의 시작부터 패배자라 일자리를 못 얻는 우리보다는 백인인 당신 처지가 훨씬 낫다”는 말을 듣고“지금 불평하기 전에 내가 얼마나 높은 계단에 올라서 있는지를 봐야겠다”고 깨닫는다. / 위즈덤하우스 제공
―계획과 효율을 목숨처럼 중시하는 독일인인 당신이 여행 일정과 노선도 안 짜고 여행했다는 걸 믿으라고?

"독일인은 계획과 개념을 좋아한다. 여행에 대한 내 '개념'은 한마디로 무(無)계획이었다. 길에서 우연히 일어나는 사건, 한 번도 상상하지 못한 상황과 맞닥뜨리고 싶었다. 해보니 내 생각이 맞았다. 여행, 계획하고 가는 거 아니더라. 흐름을 따라가는 게 중요하다. 덕분에 배웠다. 여행자에게 필요한 건 '효율성'이 아니라 '적응력'이란 걸. 독일서 일할 땐 효율이 중요했지만, 말레이시아에선 함께 일하는 사람이 서로를 이해하느냐가 먼저다. 독일에선 도착한 순서대로 줄을 섰지만, 중국에선 빈자리가 있으면 사람들이 마구 끼어들었다. 중국에선 '누가 더 급한가'가 중요했다. 먼 길을 떠날 때일수록 짐이 가벼워야 한다. 배낭 속 짐뿐 아니라 머릿속에 든 짐까지."

'구경꾼'에서 '행동하는 여행자'로

2010년 4월 쿠알라룸푸르. 구직 이메일을 수십 통 보낸 끝에 쿠알라룸푸르 디자인 위크의 자원봉사 일을 하게 됐다. 디자인 위크 개막식 몇 시간 전 그에게 '국제홍보대사'라는 거창한 직함이 주어졌다. 자원봉사자 중 유일한 외국인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업무는 디자인 위크 참가자들과 '악수'하는 것. 이 '계산 정확한' 독일인은 마음이 불편했다.

―쉬운 일을 하면서 대우받으면 좋은 것 아닌가.

"잠시 머물다 가는 여행자일지라도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그들은 나를 그저 '손님'으로 대했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말레이시아를 떠나기 전날 밤 디자인 위크의 내부 평가 회의에 참석했다. 당시 디자인 위크는 도심 쇼핑몰에서 열렸는데, 어떻게 모조 시계나 싸구려 보석을 파는 매장 한복판에 예술품을 전시할 수 있는지 이해가 안 됐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최대한 돌려 말했다."

―자원봉사자가 주제넘은 일을 했다 싶었겠다.

"회의실이 순간 침묵에 싸였다. 그날 밤 한숨도 못 잤다. 다음 날 새벽 공항으로 떠나는데 디자인 위크 준비위원장이 내게 '아무도 못했던 이야기를 해줘서 고맙다. 당신은 우리에게 신선한 자극이었다'고 했다. 나는 배낭 하나 짊어지고 여기저기 옮겨다니는 떠돌이에 불과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에게는 선물 같은 존재가 될 수도 있다는 걸 배웠다."

쾨르너는 말한다. "여행은 시시각각 예상치 못한 사건과 인연을 툭툭 던져준다. 그것은 일종의 신호와도 같다. 변화할 것인가, 그대로 멈춰 있을 것인가를 묻는 신호. 그 모든 신호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여행자의 운명은 달라진다."

그렇게 그는 한 발짝씩 성장했다. 하지만 여행은 그에게 위기도 줬다. 여행을 떠난 지 1년쯤 됐을 때 그의 여자 친구는 "너는 1년 동안 여행했고, 나는 그동안 여기서 너 없이 살아가는 삶을 설계했다. 그 안에 네 자리는 없다"고 했다. 그걸로 이별이었다.

―장거리 연인은 헤어지기 쉽다던데, 여행이 끝나고 나니 이별 이유를 알겠던가.

"관계란 두 사람이 함께 성장해야 이어지는 것이다. 떠났던 사람은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돼 돌아왔는데, 남아 있던 사람은 예전 그대로라면 끝날 수밖에 없는 거다."

쾨르너는 2011년 3월 '수련 여행'의 2막을 시작한다. 여행 1막에서 방문했던 쿠알라룸푸르와 인도 벵갈루루에서 각각 "새로운 프로젝트에 참여하지 않겠느냐"는 이메일이 온 것. 실연으로 잃어버린 자신감 회복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그는 친숙한 곳에서 새로운 여행을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씁쓸하게 시작된 여행의 '2막'은 1막과 뭐가 달라졌나.

"첫 1년을 그저 구경꾼으로 여행했다면 '2막'에선 행동하는 여행자였다. 다시 찾은 벵갈루루에서는 노상 방뇨 방지를 위해 길거리에 공중화장실 포스터를 붙이는 작업을 했다. 인도 정부의 '공공장소 댄스 금지법'에 항의하려고, 춤이 금지된 곳에서 계속 춤을 추는 동영상을 소셜미디어에 올리기도 했다."

―미국 사진작가와 쿠바에 가 독재 정권 아래서 고통받는 사람들의 인터뷰 영상을 찍기도 했는데.

"그 동영상은 공개하지 못했다. 영상 속 사람들의 안전이 걱정스러웠다. 내 여행 중 가장 고통스러운 기억은 쿠바였다. 여행이란 낭만을 안고 떠난 자에게 현실을 보여주기 때문에 냉정하다는 걸 깨달았다. 진짜 세상은 인터넷 검색창이 아니라 두 다리로 직접 걸어 들어가야만 알 수 있는 거였다. 체 게바라를 좋아했던 내게 쿠바는 '자유'의 나라였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 쿠바 사람들이 자유롭게 타국을 여행하는 우리를 부러워했다. 그들은 쿠바 밖에 어떤 세상이 있는지 알지만 그곳에 갈 수 없어서 괴로워했다."

여행은 돌아옴으로써 완성된다
수련여행의 10계명
그의 베를린 집 침실 한가운데에 커다란 침대가 있다. 여행을 시작한 후 갖게 된 162번째 잠자리다. 2년 4개월간 그는 침대 64개, 소파 12개, 매트리스 7개, 열차 침대 두 개, 매트 한 개, 그리고 버스, 지프, 비행기의 수많은 좌석에서 잠을 청했다. 그는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서 이렇게 말했다.

"여행은 (출발점으로) 돌아옴으로써 완성된다. 하지만 그건 원점 회귀와는 다르다. 모험에서 돌아온 옛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떠나기 전과는 전혀 다른 내면을 갖고 있다. 그들은 더 나은 존재가 되고, 이전과는 다른 눈으로 삶과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

―여행 후 생각이 달라지던가. 무엇이 가장 달라졌나.

"직업에 대한 생각이다. 여행을 시작할 땐 여행하는 동안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걸 찾고 전문성을 키우려고 했다. 그런데 여행을 끝낸 후에는 직업으로 꼭 한 가지를 택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렸다. 나는 여행 이야기로 책을 써 작가가 됐다. 다음 주에는 스리랑카로 가서 두 달간 서핑 투어리즘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는다. 거기 있는 동안은 그게 내 직업이다. 나는 여행을 통해 내가 무엇이든 될 수 있고, 어떤 삶이든 살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더 이상 스트레스 받지 않는다. 더 이상 살아남아야(survive) 한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생겼다. 지금 당장 이 집이 불타 없어진다 해도 인생은 계속될 것이고, 나는 살아있을(alive) 것이다."

―긴 여행 동안 가장 힘든 건 무엇이었나. 향수병?

"따뜻한 독일 호밀빵이 그립긴 했지만 그건 없어도 산다. 가족과도 화상 채팅으로 이야기하면 됐다. 가장 힘든 건 새 친구를 사귀는 일이었다. 겨우 한 사람과 가까워지면 4~6주 후에 '굿바이' 하고선 다른 곳에서 같은 과정을 또 시작해야만 했다. 친구를 만들고, 또 잃고…. 그게 참 진 빠지는 일이었다."

―수많은 사람이 떠나길 원하지만, 실제로 떠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책이 나오자 나처럼 떠나고 싶다는 사연을 담은 편지가 엄청나게 쏟아졌다. 그들에게 팁과 힌트를 주었지만 아무도 떠나지 않았다. 많은 사람이 떠나고 싶다는 소망을 가지고 있지만 떠난 후에 일어날 일들을 두려워하는 것 같다. 여기에 그대로 있어야 좋은 직업과 기회가 주어진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런 기회는 여행에서도 똑같이 주어진다. 사람들은 두려워하다가 결국 모든 걸 놓친다."

―그래서 당신에게 여행이란 무엇인가.

"답(答). 만일 당신이 어떤 질문을 갖고 있다면, 여행은 그에 대한 답을 알려줄 거다."

그의 한국어판 저서에 사인을 요청했더니 그는 이렇게 적었다.

"Enjoy your travel and always cross borders(여행을 즐겨라, 그리고 항상 경계를 넘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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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운 영혼과 멋진 행동력과 실천이 부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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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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