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크(MOOC)와 거꾸로 교실: 기술은 교육을 구원할 수 없다
얼마 전 슬로우뉴스에서 무크(MOOC) 관련 기사를 발행한 적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저는 저 명제를 다시 한 번 숙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술은 그 자체로는 결코 교육의 구원자가 될 수 없습니다. 너무 강한가요? 일전에 SNS에서 비슷한 생각을 꺼내 놓았을 때 ‘기술에 대해 막연한 반감이 있는 사람’으로 오인된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반대입니다.
저는 90년대 후반부터 웹과 교육의 유기적 관계에 대해 고민해 왔고, 수년간 이러닝(e-learning; 인터넷을 비롯한 다양한 디지털 플랫폼을 활용한 학습) 및 블렌디드 러닝(blended learning; 이러닝과 전통적 학습의 장점을 결합한 학습 모델) 시스템의 개발을 책임지기도 했습니다.
학습과 기술발전의 관계를 탐구하지 않고 교육의 질을 향상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고 믿었기에 이런 일들을 했었죠. 그럼에도 테크놀로지와 교육의 관계에 대한 저의 결론은 늘 ‘테크놀로지는 해결사가 아니다’ 였습니다. 이 글을 통해 그 이유를 차분히 나누어 보려 합니다. 몇 가지 예시를 통해 기술이 교육에 미친 영향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장면 1: 인쇄술의 발달, 문해력이라는 사회적 과제
고대 그리스에서는 사람들이 모여 듣고 말하는 방식으로 교육이 이루어졌습니다.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은 여타의 테크놀로지를 매개로 하지 않고 면대면 대화를 통해 이루어졌죠. 직접 만남을 통한 교육법은 중세를 지나 구텐베르크 은하계의 도래에 이르러서야 중요한 기술적 변화를 만납니다.
문자로 된 자료가 공유되면서, 누군가의 생각이 다수의 사람들에게 전달될 수 있게 된 것이죠. 실제로 인쇄술 혁명과 함께 지식의 생산, 유통, 공유방식에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이는 지식의 양적 팽창에 그치지 않고 인류가 역사와 진리를 보는 관점까지 변화시켰죠. 점진적이긴 하지만 지식의 대중적 공유가 가능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인쇄술과 그 총아인 책이라는 매체의 보급은 문해력(literacy)의 불균등한 배분이라는 새로운 교육적 문제를 만나게 됩니다. 인쇄술은 일부 특권층의 소유였던 지식을 대중의 손에 쥐여줄 수 있었지만, 지식의 실질적 확산을 보장하진 못했죠. 문자를 읽어낼 수 있는 해독력, 나아가 그 내용을 맥락에 맞게 이하고 적용할 수 있는 비판적 문해력이 없다면, 책은 종이 위의 잉크 자국, 혹은 기껏해야 냄비 받침일 뿐이니까요.
인쇄술이라는 테크놀로지는 인류의 가장 중요한 자산 중 하나가 되었지만, 결코 교육을 구원하지는 못했습니다.
장면 2: 웹 기반 교육의 가능성과 한계
제가 처음으로 IT를 기반으로 한 교육에 뛰어든 것은 1997년도였습니다. 아직 월드와이드웹이 활성화되지 못했던 시기여서 PC 통신을 기반으로 새로운 교수·학습방법이 실험되고 있었죠. PC 통신 플랫폼에서 텍스트와 이미지, 게시판, 채팅 등을 통해 중고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다 보니 웹기반 교육의 가능성을 모색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많은 혁신가와 교육공학자들은 웹의 발달에 따라 ‘언제 어디서나 자신이 원하는 속도로 공부할 수 있는 플랫폼의 개발이 가능할 것’이라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죠. 저도 그런 기대가 현실이 되길 바랐습니다. 하지만 네트워크에 접속하여 다양한 교육자료를 활용할 수 있다고 해서 교육의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라는 걸 아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더군요.
닷컴 버블이 꺼지면서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온라인 교육업체 대부분이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그 와중에 입시나 기업교육을 기반으로 한 몇몇 교육서비스만이 살아남았죠. 이 시기를 통해 배울 기회가 많아진다고 배움이 곧바로 증가하는 것은 아니라는 자명한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책이 많아진다고 해서 문해력이 저절로 높아지지 않듯 말입니다.
문득 어렸을 적 주린 배를 움켜쥐고도 요리할 엄두를 내지 못하던 저를 향해 하셨던 어머니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냉장고에 먹을 게 넘쳐나도 엄마가 없으면 먹을 게 없지?”
교육적 자원과 학습의 관계도 비슷합니다. 배울 거리가 온 세상에 넘쳐나도 다 쓸모있는 지식이 되는 건 아니라는 말입니다. 물론 학습자들 모두가 요리할 줄 모르는 아이는 아닐 겁니다. 능수능란한 요리사 같은 학습자도, 재료를 대충 섞어 먹고도 만족할 수 있는 학습자도, 심지어 생쌀을 우걱우걱 씹어먹을 수 있는 학습자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자원이 많아진다고 해서 학습이 저절로 일어나진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걸 찾아주는 ‘구글신’이 있지 않느냐고요? 그렇습니다. 구글은 많은 문제를 해결해 줍니다. 단, 검색결과를 합리적으로 선택하고 세밀하게 분석하여 자신이 처한 맥락에 적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이들에게만 그렇습니다.
장면 3: 판서는 구닥다리 테크놀로지?
상하이 등 중국 주요 도시의 높은 PISA 성적의 배경으로 효율적인 강의와 판서를 지목한 기사를 본 일이 있습니다. 구성주의 학습관에서 강조되는 ‘발견학습’이나 ‘프로젝트학습’이 능사는 아니라는 것이죠. 사실 저의 학창시절을 돌아보면 제 인생 최고의 수업들은 ‘일방적인 강의’와 질의응답을 교수법으로 사용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기사의 내용이 정밀한 실험연구에 기반한 것은 아니므로 여러 맥락에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매체의 조화와 효과라는 측면에서 ‘판서의 재발견’에는 나름의 근거가 있습니다. 교실에서의 소통 매체는 크게 말과 (이미지를 포함한) 글로 나뉘며 각각의 매체에는 고유한 강점과 약점이 있습니다. 얼핏 보기에 판서를 이용한 강의는 최첨단 멀티미디어와 완전히 반대 방향에 놓여 있는 듯합니다.
그런데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여기에는 큰 허점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훌륭한 판서는 이제 퇴출해야 할 구닥다리 매체가 아니라, 말(음성언어)과 글(문자언어)을 실시간으로 엮어 두 매체의 장점을 최대화하는 멀티미디어이기 때문입니다.
판서를 능숙하게 활용하는 교사는 말과 글의 어울림을 통해 학생들의 주의를 집중시킵니다. 자유자재로 설명의 속도를 조절하고, 중간 중간에 학생의 참여를 유도하기도 하죠. 삽화나 그래프 등의 시각적 요소까지 곁들일 수 있습니다. 고가의 제작비를 들여 학습 시나리오를 구성하고 교과 내용에 최적화한 멀티미디어 자료를 만들지 않는 이상 판서에서 이루어지는 미디어의 절묘한 조화를 따라잡기 힘듭니다.
교육과 테크놀로지의 관계를 생각할 때 가장 범하기 쉬운 오류는 ‘교육 혁신을 주도하는 테크놀로지’라는 개념으로 최신 기술에 맹목적인 찬사를 보내는 일입니다. 그러나 과연 테크놀로지가 교육을 혁신할 수 있을까요? 현재의 다양한 멀티미디어 콘텐츠가 노련한 교사의 판서보다 더 낫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요? 수업의 목적과 교과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최신의 테크놀로지를 사용한다면 오히려 학습 효율을 떨어뜨릴 수 있지 않을까요?
제가 주변 사람들에게 즐겨하는 말이 있습니다.
사실 얼굴 보고 대화하는 게 최고의 멀티미디어야. 자유자재로 속도 조절 가능하지, 볼륨도 최적화할 수 있어. 때론 연설할 수도, 연기할 수도 있고. 문제는 최신 기술이 아니야. 학생을 사로잡는 교사의 능력이지. 교사가 곧 메시지고 미디어야.
장면 4: 산 호세 주립대 철학과가 마이클 샌델에게 보낸 공개서한
2013년 봄 산 호세 주립대 철학과 교수들은 하버드대 교수이자 [정의란 무엇인가]의 저자인 마이클 샌델에게 공개편지를 띄웁니다. 내용을 곡해하지 않는 선에서 시작 부분의 골자를 소개합니다.
친애하는 마이클 샌델 교수께산 호세 주립대는 최근 MIT와 Harvard와 손잡고 있는 EdX와 계약을 맺었습니다. 저희가 일하고 있는 철학과는 대학 당국으로부터 당신의 강의를 바탕으로 만든 JusticeX 강의를 실험적으로 사용해 보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이를 거부했습니다. 해당 강의의 사용을 거절한 이유를 공적으로 알리고 싶었습니다. 다른 과나 대학들도 저희와 비슷한 상황에 놓이게 될 가능성이 높으니까요.저희가 당신의 강의를 사용하지 않기로 한 이유는 이렇습니다.산 호세 철학과에는 JusticeX가 해결해 줄 교육적 문제가 없습니다. 비슷한 종류의 강의를 담당할 교원이 부족한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MOOCs에 대한 요구가 장기적인 재정적 고려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안타깝게도 JusticeX와 같은 MOOC 강좌들을 사용하는 것은 산 호세 대학에 큰 위협이 될 수도 있습니다. 또한, MOOC의 사용이 교육의 질을 떨어뜨릴 수 있다고 봅니다.
위의 서한에서 제가 가장 주목했던 것은 바로 “산 호세 철학과에는 저스티스엑스(JusticeX)가 해결해 줄 교육적 문제가 없습니다”라는 대목이었습니다. 해결할 문제가 없는데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는 말은 애초에 성립할 수 없겠죠.
산 호세 주립대 교수들은 저스티스엑스(JusticeX)가 의도하는 것은 교육적 문제 해결이 아니라 중장기인 재정 확충이라는 의견을 내놓습니다. “손에 망치를 들고 있으면 온 세계가 못으로 보인다”는 말이 있죠. 적어도 산 호세 철학과 교수진에게 무크는 난데없이 나타난 망치 같은 존재였던 것입니다.
장면 5: 거꾸로 교실(Flipped Classroom)의 동력
새로운 테크놀로지의 가능성을 보여주기 위해 종종 언급되는 교육방식으로 ‘거꾸로 교실’이 있습니다. 거꾸로 교실의 핵심 아이디어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을 것입니다.
- 학생은 교사가 미리 제작한 동영상 등으로 기본 내용을 숙지.
- 교실 수업에서는 토론 및 심화학습, 응용이나 협업 프로젝트 진행.
- 교사 역할은 지식 전달자에서 학습활동 촉진자로 변화.
- 결국, 학습에 대한 통제권의 많은 부분이 학생에게 넘어간다.
살만 칸의 칸 아카데미를 시발로 하는 거꾸로 교실 모델이 한국에서도 서서히 화제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작년과 금년 방영된 KBS의 연속기획 [거꾸로 교실의 마법]은 거꾸로 교실로 대표되는 새로운 교육방식이 가져올 다양한 변화를 모색합니다.
- KBS – 거꾸로 교실
- 21세기 교육혁명-미래교실을 찾아서 – 1편 : 거꾸로 교실의 마법
- 21세기 교육혁명-미래교실을 찾아서 – 2편 : 가르침 시대의 종말
- 21세기 교육혁명-미래교실을 찾아서 – 3편 진짜 세상을 향한 교실
프로그램에 따르면 학생의 동기와 수업참여, 성적 향상, 나아가 교사들의 수업관 변화에 이르기까지 거꾸로 교실의 잠재력은 커 보입니다. 새로운 교육을 열망하며 거꾸로 교실을 실천하려는 교사 커뮤니티가 만들어지기도 했죠. 실험의 초반이니만큼 거꾸로 교실이 새로운 교육 패러다임으로 자리 잡을지는 알 수 없으나, 몇몇 성공적인 사례들을 통해 교육과 기술의 바람직한 관계에 대해 시사점을 얻을 수 있습니다.
혹자는 ‘웹과 동영상 플랫폼 등 기술적 발전’을 거꾸로 교실의 핵심 성공 요인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학생들이 기본개념을 숙지할 수 있도록 하는 기술 인프라에 방점을 찍는 것입니다. 하지만 변화의 핵심동력을 테크놀로지로 보는 관점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습니다. 학교 교육의 목표와 내용을 재정의하려는 움직임, 아울러 교사-학생 간의 관계변화를 모색하려는 흐름을 놓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공적인 거꾸로 교실 수업에서 학습자는 더는 미리 정의된 지식을 받아먹는 존재가 아니라 교사 및 친구들과 머리를 맞대가며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하는 배움의 탐구자가 됩니다. 일방적인 지식전달은 설 자리를 잃고, 한 번도 학습의 주체가 되지 못했던 학생들이 수업의 주인공이 되는 경험을 합니다. 게다가 교사는 의식적으로 학생에 대한 통제를 최소화합니다.
마음껏 떠들어라!틀려도 좋으니 자기 생각을 펼쳐보라!실패하면 다 같이 해보자!
이런 경험을 통해 교사도 학생도 학교 교육을 새롭게 정의하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공적인 ‘거꾸로 교실’은 무크와는 반대 방향으로 달려갑니다. 거꾸로 교실은 테크놀로지를 활용하여 교실이라는 전통적 공간을 새롭게 인식하고 정의합니다. 교실에서의 상호작용을 증가시키며 학습자의 자율성을 강화하는 방향을 택하는 것이죠. 결과적으로 교육 주체들 간의 소통이 증가합니다.
반면 무크는 교수자와 학생 간의 거리를 더더욱 벌립니다. 익명의 학습자들이 증가하고, 교육 주체 간의 소통은 줄어듭니다. 이런 상황에서 무크를 통해 실력을 키우고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은 소수로 한정됩니다. 이미 사회경제적, 교육적 혜택을 누려왔던 사람들로 말입니다.
정치·경제적 구조와 교육의 변화
최근 회자하는 무크에 대한 희망과 찬사는 90년대 말 웹 기반 교육 초기에 유행했던 “언제 어디서나 원하는 내용을 자신만의 속도와 스타일로”라는 구호와 닮았습니다. 웹 기반 교육은 새로운 교육기회를 창출했지만, 디지털 디바이드(digital divide; 디지털 자원에 접근할 기회가 불균등하게 배분되는 현상)와 함께 디지털 문해(digital literacy; 다양한 디지털 미디어를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의 불균등한 분배를 야기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냉철하게 바라보면 무크가 교육을 대중의 품에 안겨주고 있다는 믿음은 환상에 가깝습니다. MIT나 스탠퍼드 대학교 등 무크의 선봉에 선 대학들이 여전히 ‘최고 명문대’로서의 명성을 구가하고 있다는 걸 보면 대학서열 또한 건재합니다. 학습자의 관점에서 봐도 수많은 무크는 ‘그림의 떡’이 되기에 십상입니다. 입시에 찌든 중고생들, 먹고 사는 일에 허덕이는 직장인들, 쉴 틈 없이 육아노동에 전념해야 하는 사람들, 자신의 전공을 감당하기에도 벅찬 대학생들이 무크를 활용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아직 많은 무크 강좌가 영어로 제공됩니다. 아무리 기초적인 내용이라 해도 영어라는 관문을 넘지 못하면 원하는 강좌를 들을 수 없는 일이 많습니다. 이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무크 강좌 수료증을 딴다고 해도 어떤 쓸모가 모르는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무크의 대중화는 ‘최고 권위의 강좌를 누구나 들을 수 있다’는 착시를 등에 업고 교육의 양극화를 부추길 위험마저 갖고 있습니다. ‘누구나 수강할 수 있다’고 하지만 절대 ‘누구나’가 아니죠.
폴 크루그먼(Paul Krugman)은 (교육을 통해 얻은) 지식은 권력이 아니라(Knowledge Isn’t Power)고 못 박습니다. 사회적 불평등의 문제는 결코 교육으로 해결될 수 없으며, 권력의 실질적 재분배로만 가능하다는 주장입니다. 같은 논리로 기존의 불평등한 사회경제적 구조, 그로 인해 야기되는 교육의 불평등이라는 문제에 천착하지 않는 혁신이라면 수십, 수백 개의 무크 플랫폼이 생긴다고 해도 교육이 개선될 리 없습니다.
무크가 대학교육의 자본에 대한 종속, 학문 간의 불균형 심화, 시간강사 등 비정규직 교육노동자들이 처한 열악한 현실, 대학교육의 직업교육화 등의 문제를 가리는 도구가 될 수도 있다는 건 저만의 기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불평등한 학습능력의 근저에 있는 빈곤과 양극화, 대학교육의 사회비판기능 상실 등의 근본문제를 방치한 채 배움의 기회가 늘어났음에 환호하는 일은 교육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배반하는 일일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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