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봄날 부암동을 걷는다. 벌써 7~8년 전 서울의 뜨는 동네로 주목받았지만 지금 부암동을 걸어야 하는 이유. 주목과 함께 모든 게 변하는 다른 거리들과 달리 부암동은 여전히 현재와 과거가 사이좋게 어울려 있기 때문이다.

종로구 부암동은 복잡한 서울의 도시여행자들에게 숨구멍이 된 지 오래다. 골목을 돌면 울창한 숲이 툭 튀어나오고 귓가에는 새소리가 울린다. 꽁꽁 숨어 있던 동네는 2007년 방송된 드라마 <커피 프린스 1호점>으로 대중에게 알려져 도시여행자들의 수첩에 단골 메뉴로 올랐다. 8년 전과 다름없이 정류장 앞에는 채소를 파는 노인이 두런두런하고 오래된 주택은 여전하다. 최근 새로 단장한 곳도 여럿이다. 그래도 가로수길이나 삼청동 등에 비하면 변화 속도는 느리다. 군사보호구역,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인데다 산자락을 끼고 있어 큰 건물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작은 변화를 담은 ‘뉴부암동’ 안내서를 작성했다.
부암동 최고 전망대 
산모퉁이카페서 자하미술관으로 
고요하던 백사실계곡 
인기 데이트 코스로 
A코스 조용한 명상형인 당신, 자하미술관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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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암동주민센터의 뒷골목에는 단정한 한옥 문이 활짝 열렸다. 올해 3월에 개원한 ‘무계원’이다. 세미나, 강연, 다도와 전통음식 체험을 하는 문화공간인 이곳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하다. 본래 안평대군 별장지였던 이곳은 옛것과 지금이 섞인 부암동마냥 독특하다. 1970년대 요정정치의 산실 하면 3곳을 꼽는다. 삼청각, 대원각, 오진암. 무계원의 대문과 안채는 오진암에서 뜯어 온 것이다. 1953년 한정식집으로 등록해 서울시 등록음식점 1호인 익선동의 오진암은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의 단골집으로 유명하다. 조선말 내관 이병직이 지은 오진암은 그가 죽자 일반인에게 인수됐다. 3대까지 영업을 했으나 결국 2010년 비즈니스호텔 ‘이비스 앰배서더 인사동’이 들어서면서 사라졌다. 종로구청은 팔작지붕이나 사각기둥 등의 가치를 인정해 전통문화시설로 일부 복원해 무계원으로 옮겼다.
골목길에는 낮은 숨을 뱉는 여행객의 소리만 잔잔하게 퍼진다. 헉헉 숨이 차오를 때쯤에 반계 윤웅렬 별장이 떡하니 위용을 자랑한다. 서울시 민속문화재 제12호. 문은 굳게 닫혀 있다. 지금은 개인 소유라 들어갈 수 없으나 담벼락을 뺑 돌아 멀찌감치 보는 정취가 있다. 아름다운 70년대 녹슨 문짝도 만난다.
골목은 더 좁아지고 자하미술관은 보이지 않는다. 인내를 시험한다. 포기할 요량으로 마지막 골목만 돌아보자고 결심하자 미술관이 얼굴을 삐쭉 내민다. 사업가인 강종권(59)씨가 7년 전에 지은 미술관이지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요즘이다. 2층 난간에 서자 부암동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고, 산자락 훈풍이 볼을 쓰다듬는다. 내려오는 길에는 오를 때 지나쳤던 무계원 앞의 ‘카페 애프터유’의 시원한 유자청 주스가 기다린다. ‘어쨌거나, 1㎜’도 있다. 카페는 차만 팔지 않는다.
유학생이 만든 독립잡지 <마일스>(miles)와 주인 박선영(39)씨가 제작한 가구나 또래 예술가들이 만든 초공예품, 가방 등이 즐비하다. 박씨는 작년 가을에 이 동네로 이사 왔다. 10년 남짓 부산국제영화제의 마케팅 담당자로 일하다 취미로 시작한 가구 제작이 직업이 됐다. “가구든 손 공예품이든 1㎜의 오차라도 생기면 완성이 안 된다”며 카페 이름을 설명한다. 그는 아직도 이웃 일에 참견하는 골목길 정서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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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코스 데이트에 나선 당신, 백사실계곡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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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프린스 1호점>촬영지였던 카페 ‘산모퉁이’가 있어 여행객이 주로 찾는 산책길이다. 걷다 보면 서로 눈인사 나누는 등산객들을 여럿 만난다. 소란스러운 인파 속에 애정을 확인한다.
창의문 삼거리의 ‘계열사’(鷄熱社)는 치킨집이다. 7~8년 전에는 ‘치어스’였다. 주인 박선옥(61)씨는 “우리 집이 유명해지자 체인점 하는 이들과 분쟁이 생겼다”고 한다. 재밌는 한자 조어인 계열사와 ‘박선옥 부암동 치킨’으로 이름을 바꾸고 상호 특허를 냈다.
비탈을 오르자 뱀 꼬리처럼 길이 쭉 이어진다. 담쟁이가 빽빽하게 얽힌 담을 지나 숨을 고를 때쯤 2년 전 문 연 ‘라 카페’가 나온다. 박노해 시인이 설립자이자 상임이사인 나눔문화연구소가 운영하는 카페다. 3, 4층은 연구소, 2층은 전시장이다. 지난 5월 발표한 시인의 사진들이 걸렸다. 깜깜한 흑백의 인화지에는 아시아의 애처로운 민낯이 찍혔다.
작년에 생긴 ‘공간 291’을 빼놓을 수 없다. ‘책가도’ 연작으로 미술계에서 인정받은 사진가 임수식(40)씨가 동료 사진가 신강욱, 큐레이터, 아마추어 사진가 등 22명과 함께 ‘협동조합 사진공방’을 만들고 그 첫 작업으로 연 공간이다. 누구나 무료로 볼 수 있는 사진책방과 전시장은 공들인 티가 역력하다. 우리 일상에 쑥 들어온 사진은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부암동과 꽤 닮았다. 쉽게 이미지를 채집한다는 점에서 평범하지만 이미지마다 철학이 다르다는 점에서 평범하지 않다.
카페 산모퉁이와 한국방송(KBS)의 예능 프로그램 <인간의 조건>의 게스트하우스를 지나자 ‘백사실계곡 입구’가 드디어 나타난다. 7년 전만 해도 인적이 드문데다 ‘웅’ 하는 바람 소리와 펄럭이는 나뭇잎에 소스라치게 놀라기 십상인 곳이었다. 지금은 그야말로 시골 장터처럼 북적인다.

C코스 호기심 천국인 당신, ‘저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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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암동 번화가(?)인 도로변을 중심으로 아기자기한 공방, 옷가게, 카페 등 재미난 볼거리에 푹 빠지는 여행코스다. 굳이 운동화가 필요 없다.
부암동주민센터 옆의 ‘예가구’는 가구 갤러리를 겸한 공방이다. 주인 김태원(40)씨는 “예술가들이 많이 사는 정취가 좋다”는 생각에 지난해 날아들었다. 화장대와 책상을 겸한 가구 등 아이디어가 빛나는 단아한 수제 가구가 많다. 자하문터널 입구 방향으로 발길을 돌리자 부암동 서울미술관까지 10여개의 작은 옷가게와 개성 있는 카페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서울미술관 앞에서 길을 건너도 풍경은 비슷하다. 올해 4월에 문 연 ‘앨리스의 티팟’은 전세계에서 모은 수백개의 인형이 벽과 바닥, 선반을 차지한 채 손님을 맞는다.
디자이너 임선옥씨의 매장 ‘파츠파츠’와 붙은 골목길은 환기미술관으로 이어지는데,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내 마음은 콩밭’은 에코 디자인 가방, 공예품을 팔고 드로잉 강좌도 여는, 김희(59), 박열음(28) 모녀가 주인인 공간이다. 부암동 주민인 그는 마당에서 기른 채소로 버섯덮밥 등을 만든다. “마당이 있는 집이 주는 기쁨은 참 크다.”
환기미술관을 지나 다시 번화가 도로변으로 나오면 꽃집 ‘인피오라타’, 컵케이크 집, ‘부암동 빙수집’, ‘세컨드 스토리’ 등이 줄지어 있다.
도로의 끝자락에 ‘저집’이 보인다. 젓가락(저) 전문점이다. 지난해 9월에 연 저집은 다채로운 100여가지 젓가락과 소반으로 이미 명소의 반열에 들었다. 대표 박연옥(50)씨는 “조선시대 손재주 많던 이들이 살던 곳”이라서 이곳에 터를 잡았다고 말한다.
고즈넉한 부암동을 잊게 하는, 마치 카페 거리로 착각하게 할 만한 순례코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