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비슷한 듯 부정확한 한자어
여러 직위 두루 거쳤다는 뜻의 '역임'… 한 직위일 땐 '지냈다'로 써야 맞아
"지금 세월호 희생자를 '추도(追悼)'하거나 '추모(追慕)'한다는 말은 올바른 표현이 아니다." 역사학계의 원로인 정구복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가 지난주 본지에 투고한 글의 내용이다. 정 교수는 "'추도'와 '추모'는 장례 절차가 끝나고 일정한 시간이 지난 뒤에 사용하는 말"이라며 "장례 중이나 상중에는 '애도(哀悼)' 또는 '조문(弔問)' '조위(弔慰)'라는 말을 써야 한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추(追)'라는 글자에 '옛일을 거슬러 올라가다'라는 뜻이 있다는 것을 모른다면, '추도(죽은 사람을 추억하며 슬퍼함)' '추모(죽은 이를 추억하며 그리워함)'가 '애도(사람의 죽음을 슬퍼함)' '조문(남의 죽음에 대해 슬퍼하는 뜻을 드러내며 상주를 위문함)'과 어떤 의미상의 차이가 있는지 알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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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지긋한 묘령의 남자'라니…얼핏 비슷해 보이지만 그 뜻이 뚜렷이 다른 어휘를 엉뚱하게 사용하는 예가 늘어나고 있다. 인터넷과 SNS는 물론, 각종 뉴스 기사에서도 이런 예가 많이 나타난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한자어로 된 한국어 어휘를 한글로만 표기하는 한글 전용(專用)이 낳은 폐해 중 하나다.
심지어 성(性)이나 행위의 주체가 뒤바뀌는 것도 모른 채 용어를 쓰는 경우도 많다. 인터넷에서 '묘령의 남성'이란 표현이 있는 뉴스 기사를 검색하면 200건 넘게 뜬다. "걸그룹 멤버가 묘령의 남성과 키스하고 있다"는 식이다. 심지어 '묘령의 노인'이란 표현도 있다. 하지만 '묘령(妙齡)'이란 '나이를 알 수 없는'이 아니라 '스무 살 안팎의 여자 나이'를 뜻한다. 남성의 이력을 설명하며 "요직을 두루 거친 뛰어난 재원"이라고 표현하는 경우도 많다. '재원(才媛)'이란 '재주가 뛰어난 젊은 여자'란 뜻이니 이만저만한 실례가 아니다.
"얼음물 속 10대 구조 임신부 용감한 시민상 수여"라는 방송 기사 제목은 '수여(授與)'라는 말이 '(증서·상장·훈장 등을) 준다'는 뜻이므로 상을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수상(受賞)'이나 '받아'로 바꿔야 한다. "전도연 국내 최초 칸 영화제 심사위원 위촉"이란 기사 제목도 마찬가지다. '위촉(委囑)'은 '어떤 일을 남에게 부탁해 맡게 함'이란 뜻이기 때문에 이 문장에선 '맡아'나 '위촉돼'로 써야 맞는다.
"흡연을 금지해 주시기 바랍니다"란 문장 역시 이상하긴 마찬가지다. '금지(禁止)'란 '(법·규칙·명령 등으로) 어떤 행위를 하지 못하도록 함'이란 뜻이다. 즉 '내가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남이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문장은 '금지합니다'나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로 바꿔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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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서 '의가사제대' 판정?최근 한 통신사 기사는 "그는 초대 학생회장을 역임했다"는 문장을 썼다. '역임(歷任)'이란 '여러 직위를 두루 거쳐 지냄'이란 뜻이기 때문에 한 직위만을 언급한 이 문장에서는 맞지 않는 표현이며, '지냈다'로 쓰거나 '초대 학생회장 등을 역임했다'라고 표현해야 한다. 한 영화에 대해 "박스오피스 2위에 등극했다"는 인터넷 뉴스의 표현 역시 '등극(登極)'의 뜻이 '임금의 자리에 오름' '어떤 분야에서 가장 높은 자리나 지위의 오름'이라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쓰인 것으로 보인다.
"국군수도병원에서 의가사제대 대상자로 판정돼 자택에서 대기 중이었다"는 뉴스 문장은 한자 뜻을 알면 금세 오류를 알아차릴 수 있다. '의가사제대(依家事除隊)'란 '현역 군인이 자기가 직접 집안을 보살펴야 하는 가정 사정(가사·家事) 때문에(의·依) 국방부의 허가를 받아 예정보다 일찍 제대하는 것'이다. 병원에서 이런 판정을 했다니? 이 경우는 '의병제대(依病除隊)'라고 써야 맞는다.
흔히 '지향(志向·어떤 목표로 뜻이 쏠려 향함)' '지향(指向·작정하거나 지정한 방향으로 나아감)'과 혼동하기 쉬운 '지양(止揚)'이란 단어도 잘못 쓰는 용례가 많이 드러난다. 단순히 '무엇을 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더 높은 단계로 오르기 위해 무엇을 극복한다'는 뜻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최용기 국립국어원 학예연구관). "건전한 자본주의는 사리사욕을 지양해야 이뤄질 수 있다"란 문장은 맞지만, "남북의 이질화를 지양하자"는 문장에선 '지양'이 단순히 '하지 않음'의 뜻으로 쓰였기 때문에 '해소(解消)'가 어울린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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