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August 17, 2013

사회
사람들

[Why][감혜림 기자의 人生] 골수癌 투병중인 홀트아동복지회 말리 홀트 이사장

  • 감혜림 기자
  • 입력 : 2013.08.17 03:05 | 수정 : 2013.08.18 08:12

    10만명에 家族 선물한, 천사가 아프대요
    "세상에 남기고 갈 건, 옷 몇 벌과 책 몇 권…"

    고아 수출업자? 
    가족이 없는 것보다는 국적 달라도 있는게 나아요

    한국사회에서 홀트는 하나의 상징이다. 전후(戰後) 배고프던 시절, 고아, 해외 입양…. 홀트는 1956년 한국 전쟁고아나 기아(棄兒)를 해외로 입양 보내던 '홀트씨해외양자회'를 설립한 해리 홀트와 버다 홀트 부부의 성씨(姓氏)다. 세월이 흘러 명칭은 홀트아동복지회로 바뀌고 사업 영역도 국내 입양, 장애인 재활 등 다양해졌지만, 대를 이어가는 홀트가(家) 사람이 있다. 1956년 부모와 함께 한국에 온 둘째 딸 말리 홀트(78) 홀트아동복지회 이사장이다.

    미국 간호학교에서 공부한 시기를 빼고도 스물한 살부터 53년간 한국 고아나 기아를 돌본 말리 홀트 여사. 한국살이의 절반이 넘는 기간을 자원봉사자 신분으로 보냈다. 해외로 입양 가는 아이들을 데리고 수백 번 비행기를 탔고, 입양절차에 필요한 통역을 도맡았다.

    그동안 말리 홀트의 품을 거친 입양아는 대략 10만명. 천사라고 칭송도 받았지만 '고아 수출업자'라는 비난도 들어야 했다. 수십 년째 경기도 홀트일산복지타운에서 장애인들과 함께 생활하는 그이는 올해 2월 골수암 진단을 받고 투병 중이다.
    
 말리 홀트 이사장
     경기도 일산복지타운에서 장애 아이를 돌보는 말리 홀트 이사장. 2006년 암 투병 전에 촬영한 사진이다. 한국에서 반세기를 넘게 산 때문일까. 젊은 시절 금빛 머리칼에서 백발이 된 그는 영락없는 우리네 한국 할머니와 닮았다. / 홀트아동복지회 제공
    한국에서 보낸 53년

    암 진단 후 몸 상태가 안 좋아 치료를 못 받던 말리 홀트 여사는 얼마 전부터 항암치료를 할 수 있게 됐다. 살이 10㎏쯤 빠졌단다. 인터뷰 내내 양손은 왼쪽 허리춤에 붙여둔 얼음 찜질팩을 꼭 붙들고 있었다. "아이고, 미안해요. 대상포진 때문에 얼음찜질해야 해요." 통증에 목이 멘 말리 홀트 여사는 한 번 입을 뗄 때마다 5초쯤 뜸을 들였다. 대신 한국말이 유창해 몇 시간씩 여러 차례에 걸쳐 이뤄진 인터뷰에서 모두 한국말로 답했다. "1960년대 한국어학당에서 한국말을 제대로 배워 존댓말을 쓸 수있어 참 다행이다"고 했다.

    한 달 내내 비가 내리던 지난 7월 어느 날, 홀트일산복지타운을 찾았다. 장애인을 위한 생활동·작업장·체육관·학교·의료원 등이 있는 복지타운은 1962년 말리 홀트의 아버지 해리 홀트가 지었다. 나이가 많거나 장애가 있어 입양이 안 된 신생아부터 60대 원생까지 270여명이 이곳에서 생활한다.

    홀트에 들어와 40년 넘게 입양을 기다려온 터줏대감들이 '가족사진'을 찍기로 한 날이었다. 50~60대 남녀 중증장애인 10여명이 모였다. 뇌성마비 장애로 1958년에 입소해 몇 년 전 환갑잔치를 한 영희(63)씨, 어릴 때 "왜 나는 미국으로 입양이 안 되느냐"며 울었다는 뇌성마비 장애인 경수(60)씨….

    대부분 전동휠체어를 타고 있어 가지런히 정렬하는 데만 20분이 걸렸다. 조금 뒤 말리 홀트 여사가 부축을 받으며 느릿느릿 걸어나왔다. 습한 날씨와 마비 증세로 굳어 있던 이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환해지더니 힘껏 외쳤다. "말리 언니, 사랑해요."

    말리 홀트 여사는 20만㎡(6만평) 규모의 복지타운에 자그맣게 자리 잡은 '말리의 집'(66㎡·20평)에서 지낸다. 말리 홀트 여사의 평생 지기로, 50년간 시립병원과 홀트 아동병원에서 버려진 아이들을 돌보던 '할머니 의사' 조병국(80) 박사〈2012년 10월 20일자 why? 인터뷰〉도 함께 산다.
    
 홀트 부부가 1955년 한국 혼혈 아동 8명을 입양해 미국으로 데려오던 모습
     홀트 부부가 1955년 한국 혼혈 아동 8명을 입양해 미국으로 데려오던 모습. 왼쪽부터 말리의 어머니 버다 홀트, 아버지 해리 홀트, 스무 살 시절 말리. / 홀트아동복지회 제공
    ―암 진단 후 생활이 달라졌을 것 같습니다.

    "그 전엔 말리의 집에서 장애가 제일 심한 원생 예닐곱 명과 함께 살았거든요. 내가 아파서 면역력이 약해지니까 애들을 다른 방으로 옮기고 저 혼자 살 수 있게 해줬어요. 혼자 사니까 아깝죠."

    입양되는 아이를 보면서 행복했던 순간이 언제였는지 가장 궁금했다. "구십서인가(1993년)? 다들 '뇌성마비가 심해 입양이 안 되겠다'고 한 여자애가 다섯 살 때 미국으로 입양됐어요. 7년이 지나서 부모가 '우리 딸은 하늘나라로 갔다'며 편지를 보내왔어요. 우리는 뇌성마비인 줄 알았는데 마비 증세가 훨씬 더 심각해 오래 살 수가 없었대요."

    아이가 죽었는데도 왜 행복한 기억으로 남았을까. "좋은 부모를 만나 행복한 가정에서 사랑받다가 떠났잖아요. 물론 오래 살면 좋았겠지만 마비 증세가 너무 심했어요. 이미 4명을 입양했던 그 부모는 처음 아이 사진을 본 순간 '우리 딸이 돼야 한다'고 생각해 주위에서 말려도 끝까지 입양했대요. 그러니 사랑을 줄 수밖에 없었지요."

    평생 아이를 돌보면서도 말리 홀트 여사는 결혼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제게는 남편을 안 줬으니까, 하하. 그래도 만족스럽게 생활했어요. 좋은 남자를 만났을 때는 결혼 생각도 있었지만…."

    잊을 수 없는 한국 동생들

    말리 홀트 여사는 홀트 부부의 1남 5녀 중 셋째였다. 미국 오리건주에서 제재소를 운영해 큰돈을 번 홀트 부부는 1955년 한국 혼혈 아동 8명을 입양했다. 말리 홀트 여사가 스무 살 때 일이다. "당시 우리 가족이 살던 2층 집은 항상 북적거렸어요. 동생들을 보려고 이웃과 기자들이 자주 왔거든요."

    1950년 심장마비로 죽을 고비를 넘긴 해리 홀트는 6·25전쟁 관련 다큐멘터리에서 처참한 한국 아이들을 보고 후원금을 보내다가 입양을 시작했다. 부부는 입양 6개월 뒤 "더 많은 고아와 버려진 아이들을 굶주림에서 구하고 좌절감을 극복할 수 있도록 가족을 만들어주자"며 다시 한국으로 와 입양 사업을 시작했다.

    당시 한국에는 미군과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가 많았는데 '튀기'라고 불리며 차별 당했다. 홀트 부부는 아이를 버리고 간 미군에 대한 원망이 컸다고 한다. 해리 홀트는 아내에게 '피부병으로 고생하는 여자아이, 굶어서 곧 죽게 된 여자아이를 정성을 다해 치료하고 있소. 이 아이의 아버지는 미국에 돌아가 그의 가족들과 편안히 살고 있으리라 짐작되오. 그들의 죄를 아시는 하나님이 언젠가는 심판할 것이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부모가 전 재산을 입양 사업에 쏟아부었지만 자녀들은 반대하지 않았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우리가 죽어도 절대 너희에게 돈 안 물려준다. 공부하고 싶으면 너희가 돈 벌어서 하라'는 말을 듣고 자랐으니 당연한 일이었어요."

    ―입양된 한국 동생들은 어떻게 지내나요?

    "잘 살아요. 조셉, 크리스틴, 베티, 나다니엘, 폴, 헬렌, 메리, 로버트. 남자 넷, 여자 넷이었죠. 동생들의 한국 성씨를 중간 이름으로 넣었어요. 메리 채 홀트, 베티 리 홀트…이런 식으로요. 그중 남동생 3명은 저세상으로 갔어요. 나다니엘은 열여덟 살 때 하와이에서 익사했고, 폴은 올해 초 간질환으로 죽었어요. 가장 마음 아픈 동생 조셉은 알코올중독에 시달리다가 서른두 살 때 자살했어요. 나머지 동생들은 자식을 낳고, 손자도 있어요. 헬렌은 미국 오리건 대학 교직원이고 메리는 간호사예요. 2000년 돌아가실 때까지 어머니를 모신 막내 베티는 필리핀 출신 아이 2명을 입양했고요."

    말리 홀트 여사는 자살한 동생 이야기를 담담히 꺼냈다. "입양 때문에 불행해져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 아니냐"고 되물었다. "그건 아닐 거예요. 나머지 한국 동생들은 평범하지만, 행복한 생활을 했어요. 각자 다른 것 같아요. 어머니나 가족들이 조셉을 사랑하고 애를 많이 썼지만 조셉은 행복하지 않았나봐요. 하지만 친부모와 함께 살아도 이런 문제는 생길 수 있어요."

    ―입양 부모가 환상만 가져선 안 될 것 같습니다.

    "맞아, 맞아요. 입양했다고 해서 아이의 삶을 부모 마음대로 할 수 없어요. 친자식과도 갈등이 있잖아요. 다만 열 살이 넘어 입양 가면 확실히 언어나 문화 차이 때문에 힘들어해요."
    
 암 투병 중인 말리 홀트 여사.
     암 투병 중인 말리 홀트 여사. / 김연정 객원기자
    성인이냐 죄인이냐

    홀트가(家)는 한국에 온 순간부터 '버려진 아이들에게 가족을 만들어준 성인(聖人)'이자 '고아들을 해외로 내몬 죄인'이 됐다. 스스로 "문화·언어 차이와 정체성 혼란으로 불행했다"고 고백하는 입양인도 있다.

    ―외국에서 파양돼 다시 한국에 오기도 하나요?

    "보통 그 나라 안에서 다른 가정을 찾기 때문에 한국으로 오는 경우는 적어요. 1980년대 한 아이가 열두 살 때 미국에 입양됐다가 4~5년 만에 한국에 돌아왔어요. 적응을 못 하고 가족과 마음이 맞지 않아 미국에서 다섯 집 정도를 전전했대요. 절도죄로 재판을 받게 됐는데 미국 국적이 없었어요. 입양되고 몇 년 안에 양부모가 국적 신청을 해야 하는데, 여러 집을 옮겨다니느라 안 된 거예요. 결국 한국으로 추방됐고, 우리가 서둘러 한국에 있던 고모를 찾아서 인계했는데 그 뒤론 소식이 없어요. 너무 가슴 아프죠."

    ―해외입양을 '아기 파는 사업' '고아 수출'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내가 정말 화나는 말이에요."

    그가 처음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예전에 기자가 그런 말을 하기에 제가 '그럼, 당신이 입양하라'고 했더니 '내가 왜 하느냐'며 펄쩍 뛰더군요. 너무 화가 났어요. '당신만큼 입양 부모 되기 좋은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되물었죠. 한국에선 입양에 대해 인식이 나빴어요. 너무 못살 때라 해외 입양이 안 됐다면 굶어 죽었을 수도 있어요. 무조건 해외 입양이 좋다는 게 아니에요. 친부모와 살거나 한국에서 자라면 좋겠지만, 가족이 없는 것보다는 국적이 달라도 가족이 있는 게 훨씬 낫습니다."

    말리 홀트 여사는 57년 전 처음 한국 땅을 밟았을 때를 기억했다. "버려지는 아이들이 너무 많았어요. 부산에 있는 영아원에서 봉사할 때였어요. 하루에 한 명씩 버려진 아이들이 들어오고 한 명씩 죽어나갔어요. 분유 아끼려고 분유 한 컵에 물을 열 컵씩 부어서 먹일 때라 애들이 너무 빼빼 말랐었고요."

    당시 일부 미국인들은 "농장에서 일할 아이를 데려왔다" "동양인을 데려와 미국을 더럽힌다"며 입양 기관을 비난하거나 협박했다고 한다. 한국인도 "외국 아무 데나 보낸다더라" "미국 데려가서 일꾼으로 쓴다더라"며 쑤군댔다. 입양될 아이를 찾으러 가면 "아이를 데려가려면 돈 내라"고 하는 한국 고아원도 있었다. 이런 소문이나 비난 때문에 힘들어하는 입양 가족을 위해 홀트아동복지회는 1957년부터 미국에 있는 입양 가족을 모아 '입양 가족 야유회'를 열었다.
    
 홀트 터줏대감들이 모여 가족사진을 찍었다.
     "말리 누나·언니 사랑해요" 지난 7월, 홀트 터줏대감들이 모여 가족사진을 찍었다. 1950~60년대 홀트에 맡겨졌지만 나이가 많고 장애가 심해 입양이 안 된 원생들이다. 경수씨(첫째 줄 오른쪽)는“말리 누나는 다정하다가도 잘못하면 눈물이 쏙 빠지게 야단쳤다”고 말했다. / 김연정 객원기자
    장애아 국내 입양은 여전히 적어

    말리 홀트 여사는 "한국 경제가 발전하면서 버려지는 아이가 줄고, 입양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어 국내 입양이 늘었다"면서도 "장애아는 여전히 국내 입양이 잘 안 돼 안타깝다"고 했다. "경제가 발전해도 한국에서 미혼모가 낳은 아이나 장애아를 키우긴 여전히 어려워요. 돈이 많이 들고 시선도 곱지 않아요. 1995년에 입천장과 입술 갈라짐이 심한 여자아이가 들어왔는데 얼굴이 너무 흉해서 입양이 잘 안 될 거라고 했어요. 그런데 미국에 무료 수술을 받으러 가서 머물던 위탁가정에서 기적적으로 이 아이를 입양했어요. 이후 미국에 이민 가 살고 있던 친부모도 찾았고요. 아기를 수술시키고 키울 형편이 안 돼 시설에 보냈던 모양이더군요. 작년에 미국에서 그 아이를 만났는데 수술 자국이 조금 남았지만 참 밝게 잘 자랐어요."

    홀트아동복지회를 통해 입양된 해외 유명 인사도 여럿 있다. 올림픽 메달리스트인 토비 도슨 한국 스키 국가대표팀 코치, 미 항공우주연구소 수석연구원인 스티븐 모리슨 한국입양홍보회 회장, 플뢰르 펠르랭 프랑스 중소기업·혁신·디지털경제장관, 장 뱅상 플라세 프랑스 상원의원…. 배우 대니얼 헤니와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의 어머니들도 홀트 출신이다.

    일부에선 "성공한 입양인을 내세워 해외 입양에 대한 과오를 덮으려 한다"고도 말한다.

    홀트아동복지회는 자신이 태어난 곳과 뿌리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입양인을 위해 1975년부터 모국 방문 행사를 한다. "해외에서 성공해 홀트를 찾아오는 입양인을 보면 뿌듯하고 자랑스러워요. 뿌리를 잊지 않으려는 걸 보면 고맙죠. 유명하지 않더라도 한국에 와서 봉사활동하거나 친부모를 찾으려는 입양인도 많아요. 입양인과 친부모가 만나면 서로 부둥켜안고 울기도 하지만 다신 찾지 말라고 화내는 부모도 있어요. 저도 통역하다가 서로에게 모진 소리를 하려고 하면 '그런 말은 전해줄 수 없다'고 버텨요."

    남길 것은 책 몇 권과 옷 서너 벌

    인터뷰 도중 말리 홀트 여사와 점심을 할 기회가 있었다. 그는 생선튀김, 샐러드, 수프 등 서양식으로 먹었다. 조병국 박사는 "말리가 나이 들고 아프니까 부쩍 고향 음식을 그리워한다"고 했다. "1950~60년대는 한국에 먹을 게 없어서 보리밥이나 강냉이죽을 먹었어요. 반찬은 무말랭이 같은 것인데 김치는 매워서 잘 못 먹었어요."

    ―암 진단을 받고 '왜 내게 병을 주셨나' 하는 원망은 안 생기던가요?

    "그런 마음은 전혀 없어요. 전 종교가 있으니까, 신의 뜻이라고 생각해요. 아마 잘 인도해주시겠죠. 그리고 컨디션만 좋으면 치료를 할 수 있다고 해요."

    1964년과 2000년에 작고한 아버지와 어머니 유해는 홀트일산복지타운에 묻혀 있지만, 말리 홀트 여사 이후 홀트아동복지회에서 일할 홀트가(家) 사람은 현재까진 없다고 한다. 입양 동생 8명을 포함해 말리 홀트 여사의 형제는 14명이다. 이미 세상을 떠난 오빠와 언니, 동생들을 제외한 나머지 형제들은 모두 미국에 터전이 있어 한국에서 활동하기가 어렵다. 말리 홀트 여사는 "물론 홀트가에서 계속 일을 하면 좋겠지만 이미 좋은 분들로 이사회가 잘 구성돼 있어서 홀트 집안 사람이 없더라도 아무 문제 없다"고 했다.

    동생들은 부모님 묘소를 보러 가끔 한국에 온다. "아버지가 한국에서 갑자기 돌아가시자 친척들은 미국으로 시신을 가져가야 한다고 했어요. 그때 어머니가 한국 땅에 묻어달라는 게 아버지의 유언이었다며 친척들을 설득했지요. 늘 '한국 땅에서 죽어 너희 아버지 곁에 묻히고 싶다'던 어머니는 미국에서 돌아가셨지만 유해만은 한국으로 모셨어요. 한국에서 오래 산 저도 언젠가는 부모님 곁에 묻히고 싶어요."

    그가 사는 공간은 아담했고 살림도 단출해 보였다. "이곳은 내 소유가 아니고 물건도 남길 게 별로 없어요. 옷 몇 벌이랑 책 몇 권 정도예요. 그나마도 누가 쓸 만한 물건은 아니에요. 처음 한국 올 때 갖고 온 가방은 너무 낡아서 버렸고, 홀트에 남아있던 사진 자료도 얼마 전에 국가에 다 기증했어요."

    그에겐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았다. 홀트 출신 장애인들이 살 집을 짓는 것이다. 얼마 전에 부지와 비용을 마련했지만 여사의 건강이 나빠져 진행을 잠시 멈췄다. "국가에서 장애인에게 생활비를 주지만 장애인에게 맞도록 지어진 집이 거의 없어요. 부모님도 평생 장애인을 위한 집을 짓게 해달라고 기도했어요. 나도 어서 건강해져서 꼭 좋은 집을 지을 겁니다."

    100자평

    2013.08.18 07:57:13신고 | 삭제
    대한민국 국민인 저는 미국과 16개국 참전국의 은혜를 잊지 못하듯이 홀트 아동 복지회와 홀트씨 가문의 한국 아동 사랑을 영원히 안 잊을 것입니다.정말 정말 감사드립니다.그리고 사랑합니다. 건강 찿으시고, 오래 오래 사십시요.
    2013.08.18 11:17:41신고 | 삭제
    눈물나게고마우신분이네요, 이렇게훌륭하신분께도 장사니하고 면전에대고감히묻는? 물에서건져주면보따리리내놓으라고한다더니이거한국인의전통인성신가요?
    2013.08.18 11:16:09신고 | 삭제
    고맙습니다. 미스 말리 홀트
    2013.08.18 10:18:44신고 | 삭제
    탈북자들 탈북행위에만 열올리고 좋아하지 탈북한 사람들은 돌보지 않는 수구들과 똑같군.
    2013.08.18 10:09:21신고 | 삭제
    고아수출이라고 비난하는 이들을 보면 참으로 측은하다. 실천 없이 말로는 무슨 일이든 못하겠는가? 대한민국은 홀트가문에 감사해야 한다. 홀트 여사님. 속히 건강을 회복하시고 하시려는 일 순조로이 성취하시기 바랍니다.
    2013.08.18 10:08:47신고 | 삭제
    고아수출업자 맞다. 자신의 명예를 위해 한국 고아들을 희생시킨것이고 한국정부의 고아대책을 느슨하게 만든 주인공이다. 홀트만 없었더라면 국내입양 지금쯤 많이 활성화 됐다. 그리고 해외입양된 한국고아들 우리가 잘된 샘플만 봐서 그렇지 대부분이 아주 비참하다. 정부는 지금이라도 아기장사하는 홀트 폐쇄하고 국내입양에 예산 써야한다..그게 바로 복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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