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의 책은 그것을 읽은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기도 하며 한 사회의 진로와 역사의 발전방향에 지대한 영향을 주기도 한다. 이런 책의 위대함 때문인지 거의 모든 언론매체는 정기적으로 책 소개 및 서평에 상당한 지면을 할애해 독자들에게 정보를 제공한다. 그런데 책이 독자의 삶을 뒤흔들 정도의 위력이 있다면, 도대체 그 책을 쓴 사람의 인생에는 어떤 충격과 변화를 가져올 것인지 궁금하지 않은가.
자신의 삶을 책으로 바꿔 낸 사람들을 만나, 책이 저자의 삶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 들어보는 기회를 갖는다. 언젠가 책을 쓴 저자가 되겠다는 꿈을 가진 사람은 많다. 하지만 모두가 꿈을 이루지는 않는다. 이미 자신의 삶을 책으로 바꿔 꿈을 이룬 저자의 인터뷰가 미래의 저자를 꿈꾸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란다. - 기자 말
▲< 3650일, 하드코어 세계일주 > 저자 고은초 씨
ⓒ 고은초
한 취업포털사이트에서 7월 20일부터 10일 간 직장인 220명을 대상으로 '로또 1등에 당첨되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가?'라는 설문조사를 실시했다고 한다. 1위는? 응답자의 41.4%가 선택한 '세계일주'다. 여유가 생기면 직장 때려치우고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고 싶은 게다. 솔직히 그런 맘인들 누가 없겠는가? 다만 로또가 당첨 안 될 뿐이지.
사람들은 세계일주 같은 장기여행이라고 하면 어느 정도 준비가 된 사람들이 떠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떠날 만큼의 자금은 모아놓은 사람들, 안 되면 시간적 여유라도 있는 사람들. 그런데 < 3650일, 하드코어 세계일주 > 의 저자 고은초씨는 로또가 당첨되지 않았는데도 다니던 직장을 후련하게 때려치우고 세계여행에 나선 사람이다. 고은초씨는 1999년~2000년에는 호주 일주를, 2003년에는 세계 곳곳을, 2007년에는 아메리카 대륙을 종단하며 3회에 걸쳐 여행에 나섰다.
"내 꿈이 세계일주다, 은퇴 후에 세계일주 떠나겠다, 저는 그런 말을 별로 신뢰하지 않아요. 그건 그냥 꿈 속의 얘기일 뿐이에요. 사실 별로 하고 싶은 생각도 없는 것이죠. 그저 당장 실현할 생각이 없는 마음 한구석의 로망일 뿐인 겁니다. 키 크고 멋있고 잘생긴 사람과 결혼하고 싶다는 얘기와 크게 다르지 않은 거예요. 만약에 세계일주가 당장 내 삶에서 정말 중요하다면 지금 해야죠. 준비하고 알아보고요. 은퇴 후에 세계일주? 아마 은퇴하고 나서도 하지 않을 걸요."
세계 일주를 하겠다고 했을 때, 누군가 말했다.
"오, 돈 많은 집 딸인가 봐요?"
그냥 웃어넘겼지만, 생각해 보니 그럴 만했다. 갑부도 아니고 갑부 집 딸도 아닌데 스물다섯에 세계 일주라니, 세계 일주를 떠나겠다고 마음을 먹긴 했지만, 내 통장에는 당장 10만 원도 없었다. 아르바이트로 버는 돈은 한 달 생활비가 될까 말까 하는 정도였다. 여기저기서 맡은 일들이 있어 여행 준비는커녕 학교 과제를 해 갈 시간도 빠듯했다. 게다가 내 몸은 그 자체로 종합병원이어서, 서너 군데씩 병원을 돌아다니다 보면 하루해가 다 갔다. 무엇보다도 튼튼해야 할 발목은 이미 완치 불가라는 진단을 받은 상태였다.
- 고은초 < 3650일, 하드코어 세계일주 > 중에서
세계 일주 루트 완성하는 데만 꼬박 넉 달
세계 일주에 관한 정보가 전무하던 때, 그래서 모두들 꿈만 꿀 때, 청춘답게 살아보겠다며 그녀는 당시에 이름도 생경했던 '세계 일주 항공권' 하나를 덜컥 끊어 '무대책 배낭을 메고 세계 일주'를 감행했다. 세계 일주 항공권은 정해진 항공 요금으로 아무리 먼 거리도 마음껏 이동할 수 있도록 전 세계 여러 항공사들이 제휴를 맺어 만든 프로그램인데, 무엇보다 치명적인 매력은 그 가격이다. 고씨가 여행을 떠나던 당시, 대륙 간 이동을 포함해 총 20회의 비행이 가능한 4대륙권 항공권 비용이 370만 원 정도였는데, 우리나라에서 남미의 한 국가만 가려고 해도 200만 원이 넘게 들었던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파격적인 가격인지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세계 일주 항공권을 발권하기까지의 과정은 그야말로 눈물겨웠다. 세계 일주 항공권이라니. 여행사 직원들은 그런 건 듣도 보도 못했다는 반응이었고, 항공사 직원들조차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루트를 완성하기까지 꼬박 넉 달이 걸렸다고 한다.
그녀는 모든 노하우와 정보를 노트에 적기 시작했다. 다 쓰고 나니 그 분량이 무려 스무 페이지가 넘을 정도였다. 나 같은 사람이 또 있다면 그 고생을 덜어주고 싶다는 생각에 쓰게 된 글은, 세계 일주 항공권과 관련해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가장 자세한 설명서라 불리며 인터넷을 통해 여행자들 사이에 퍼져 나갔고, 실제로 그 글을 안내서 삼아 세계 일주를 떠나는 사람들이 생겨날 정도였다. 하지만 노트만 정리하면 뭐하겠는가? 어쨌든 항공권을 사려면 돈이 필요했다.
"학
교에 휴학계를 제출하고 다행히 곧바로 일을 구했어요. 아르바이트가 아니라 계약직 직원으로 일하는 조건이라 보수도 그럭저럭 괜찮았고요. 드디어 초강도 경비 마련 모드가 시작된 거죠. 제가 원래 엄청 게을러서 낮 12시 수업도 늦잠 자느라 못 들어가는 사람인데 그런 사람한테 직장생활이 쉽지 않았죠. 일 끝나고 저녁에는 과외를 두 개나 했어요. 일 늦게 끝나면 버스 안에서 초코바로 때웠죠. 기숙사에 돌아오면 보통 자정이 다 됐는데 세수하고 얼굴에 스킨 바를 힘도 없어서 그냥 침대에 쓰러져 잤어요. 너무 힘들어서 혼자 울기도 하고요."
뉴질랜드선 볼거리, 페루선 식중독·고산병
그렇게 어느 정도의 돈을 모아 세계 일주 항공권과 보잘 것 없는 여비만 준비한 채 2003년에 여자 혼자 세계 일주를 떠났다. 세계일주 여행은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어설프게 떠난 만큼이나 값비싼 대가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호주의 휘트선데이 아일랜드에서는 허벅지에 심한 화상을 입었다. 스노클링을 마치고 요트에 돌아와 쿠키를 먹으려다가 끓는 물이 담긴 커피포트를 넘어뜨린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여행자수표 등 소지품을 분실했다.
뉴질랜드에서는 볼거리에 걸리고 페루에서는 식중독에 고산병 증세로 쓰러지기도 했으며, 아르헨티나에서는 2인조 택시 사기 사건의 피해자가 돼서 거지 신세가 됐다. 브라질에서는 비행기 추락 위기를 겪어 비행공포증에 걸리고 영국에서는 그나마 있던 현금카드마저 분실해서 슬럼프에 빠지기도 했다. 그렇게 생고생을 하고도 그녀는 2007년에 다시 심기일전 해 아메리카 종단여행을 떠났다. 하지만 멕시코에서 강도를 당했을 때는 경제적으로 심리적으로 큰 위기가 왔다. 그런데 최대의 위기가 최고의 순간을 맛보게 할 줄이야.
"제가 예전부터 활동하던 여행 카페에 사고를 당했다고 글을 올렸어요. 왜 올렸냐면 사람들이 남미에 간다고 하면 항상 다 '위험하다. 강도당한다. 길가다가 총 맞아서 죽는다' 이렇게 너무 부정적인 얘기를 많이 하거든요. 제 사고 때문에 멕시코가 위험한 나라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얘기했어요. 사고 당했지만 여전히 즐겁게 있고 나는 여전히 멕시코가 좋다는 취지로 글을 올렸어요.
이 글을 올리고 사람들이 위로의 댓글을 올리는 와중이었죠. 개인적으로 친한 지인 한 분이 저한테 제안을 하셨어요. 사람들한테 제 사정을 얘기를 해서 모금을 좀 해보시겠다는 거였죠. 물론 아는 사람들끼리요. 그렇게 해주실 수 있다면 부탁을 드린다고 얘기했는데 잘 안 됐어요. 아마도 자기가 좋아서 스스로 간 여행인데 자기가 책임을 져야지, 하는 분위기였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냥 포기하고 있는데, 제가 예전에 운영하던 홈페이지에 오셨던 분이 댓글로 계좌번호를 알려달라고, 적게나마 도와주고 싶다고 하셔서 댓글로 계좌번호를 알려드렸어요. 그런데 댓글을 본 여러 사람들로부터 계속 입금이 오기 시작하는 거예요.
여행에서 돈을 잃어버리거나 도난당한 경험이 있어서 그 절망감을 잘 안다며 보내주신 분도 있고요. 저와 전혀 친분이 없는 분들이 글을 보시고 여행을 무사히 마쳤으면 좋겠다며 입금해주시는 거예요. 그런 경험을 하면서 여행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감동을 받았죠. 십수 년을 인연을 맺고 알아온 지인들보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아주 먼 곳에 있는 사람들이 보내주는 응원에 너무 많이 위로가 됐어요. 그때부터 제 여행 과정을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은 제 여행을 사람들과 나누는 좋은 수단이었고요."
"책 쓰면서 가장 많이 노력했던 부분, 솔직하게 쓰자는 것"
▲고은초 씨가 쓴 < 3650일, 하드코어 세계일주 > 표지
ⓒ 위즈덤하우스
아메리카 종단 여행을 마치고 귀국한 이후, 고은초씨는 생계를 위해 일주일에 사흘 일하고 나흘 책 쓰는 생활을 계속했다. 남들처럼 종일 회사에서 일을 해서는 책을 제대로 쓰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중간에 출판사의 사정으로 1년 정도 작업이 멈추는 우여곡절도 있었지만 결국 2010년 7월에 고대하던 책이 출간됐다.
자기 인생에서 첫 책의 기쁨은 느껴본 사람만이 안다. 필자 역시 첫 책인 < 차베스, 미국과 맞짱뜨다 > 를 출간하고 교보문고에 가서 책이 어디에 놓여있는지, 누군가가 내 책을 집어 들어 살펴보는지 한 시간을 넘게 서성대며 관찰한 적이 있다. 고은초씨 역시 비슷하지 않았을까?
책은 저자와 독자의 두뇌를 이어주는 끈이다. 책을 통해 저자의 두뇌 속 경험이 독자의 두뇌 속으로 흘러들어간다. 그래서 잘 쓴 책은 독자의 두뇌를 크게 뒤흔든다. 두뇌가 흔들리면 삶이 흔들린다. 기존의 여행서 대부분이 멋있고 화려하고 때론 요란하게 치장됐다면 고은초씨의 책은 찌질하고 힘들고 좌절감이 느껴지는 여행의 이면이 날 것 그대로 들어있다.
덤벙대고 조심성 없고 대책 없지만 그래도 어쨌든 꾸역꾸역 문제를 해결하고 여행의 목적지에 도달하는 모습. 그것은 흡사 삶이라는 대책 없는 여행에서 비틀거리고 때로는 좌절하더라도 어떻게든 인생의 목적지를 향해 살아내는, 수많은 보통사람의 모습을 닮아있다. 그런 솔직함이 두뇌를 흔들 수 있구나. 필자 혼자만의 느낌은 아니었나보다.
"깊은 우울, 상실감, 침체, 무력감을 겪고 있던 분들이 누구를 통해서도 위로를 받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가, 제 책을 읽고 뭔가 용기가 생기고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실제로 실천했다는 연락이 왔을 때 정말 보람이 느껴져요. 이렇게 사고도 많이 나고 좌충우돌하는 사람이 세계일주 하는 것 보니 자신도 할 수 있겠다고 얘기하더군요. 어떤 분은 출근길에 제 책을 항상 가방에 넣고 다니면서 수시로 꺼내보신다더군요. 나중에는 책이 다 뜯어졌다고, 새로 사야겠다고 하신 분이 계셨어요.
보통 여행 책들이 화려한 여행이야기가 많아서 독자들을 위축시키는 면이 있는데, 제가 책을 쓰면서 가장 많이 노력했던 부분이 솔직하게 쓰자는 것이었어요. 저희 아버지께서 책을 쓰기로 한 저에게 유일하게 해 주신 조언이기도 합니다. 제가 문화관광부에서 안정적으로 일을 하다가 그만두고 아메리카 종단 여행 떠난다고 할 때 심하게 반대하셨거든요. 제가 저 자신을 포장하고 싶고 미화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 아버지의 그 말이 크게 도움이 됐어요.
제 책 읽고 사표 냈다는 분도 있고, 한 달 여행이 일 년 여행으로 바뀐 분도 있고, 제가 여행한 경로 그대로 여행을 하신 분도 있었어요. 내가 다른 사람에게 쓸모가 있구나, 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제 책을 통해 사람들이 여행을 대단한 것으로 보지 않고, 내가 결심하고 맘먹으면 실제로 떠날 수 있다는 용기를 주는 것 같아요."
그녀에게 새로운 인생의 진로를 열어준 여행
여행을 표현하기를, '길 위에 서는 것'이라고도 하고, '길을 찾아 떠나는 것'이라고도 한다. 길이 어디에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길을 아는 유일한 방법은, 그 길을 가보는 것이다. 당신의 삶이 무가치하고 우울하게 여겨진다면 여행을 떠나보기를 권하고 싶다. 여행은 산다는 것의 경이로움을 알게 해준다. 쇼핑과 유흥으로 점철된 관광 말고, 도시를 떠나 대자연 속에 홀로 거하는 법을 배우다 보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순수하고 절대적인 감정과 마주하게 된다. 외로움, 고독, 기쁨, 희열, 두려움, 경외,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충만한 존재감 속에서 자기 자신을 배운다. 어렵게 얘기하면 성찰이고, 쉽게 얘기하면 사랑이다. 사랑조차 깨어질 수 있지만 한 번 진지하게 사랑을 만난 사람은 다시 사랑을 배울 힘을 얻는다.
- 고은초 < 3650일, 하드코어 세계일주 > 중에서
수많은 여행기들 속을 들여다보면 눈부신 모험은 있지만, 그 후의 이야기는 베일에 가려져 있다. 오랜 기간 여행한 사람들이 특별나 보이고, < 인디아나 존스 > 의 주인공들처럼 거침없이 밀림 속을 헤쳐 나가는 것 같다. 그들의 용감무쌍한 모험담은 쉽게 접할 수 있지만 이야기는 거기까지다. 그 뒷이야기는 아무도 모른다.
떠나고 싶지만 떠나지 못하는 이들의 가장 큰 두려움은, '다녀와서는 뭘 먹고 살지? 뒤처지지는 않을까? 지금 직장만한 일자리를 다시 구할 수 있을까? 사회에 적응할 수 있을까?' 등 일 것이다. 이런 엄중한 질문들은 고은초씨라고 피해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오랜 여행을 다녀온 고은초씨는 귀국한 이후 잠을 자다가 꿈 속에서, 이미 1년 전에 사직한 직장에서 안절부절 못하며 일을 하고 새로 구해야 하는 집을 알아보러 다니다가 높은 집세에 절망하는 악몽에 시달리기도 했다.
하지만 여행은 그녀에게 새로운 인생의 진로를 열어줬다. 여행을 떠나지 않았다면 절대 살지 않았을 그런 종류의 삶 말이다. 원래 연세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고은초씨는 2007년 아메리카 종단여행을 떠나기 전 문화관광부에서 주로 외국인들에게 한류를 소개하고 통역하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직장을 그만두고 세계일주를 하는 동안 역설적으로 대한민국 사회의 '피곤함'이 크게 다가왔다.
낯선 곳에서 우리 사회를 더욱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다른 곳은 여유롭고 행복하고 삶의 질이 높아보였는데 서울은 물질적으로는 풍요롭더라도 너무 바쁘고 피곤했다. 고은초씨는 그 차이가 비롯되는 지점을 '문화'에서 발견했다. 귀국 후 문화예술경영대학원에서 문화예술정책으로 석사과정을 마친 고은초씨는 공공문화기업에서 일하며 문화재생에 관한 연구를 주로 했다.
녹슨 기차 같은 도시 서울의 삶을 벗어난 고은초씨
"여행을 통해 한국과 외국의 차이를 느끼면서 서울이 싫어지기 시작했어요. 돈을 버는 기계처럼 살면서 다들 행복하지는 않고, 그저 한 달 벌어서 다음 한 달을 근근이 사는 생활이 계속되는 것이 너무 싫은 거예요. 소비 자체가 마치 삶의 목적인양 사는 것도 싫고요. 제가 당시 여행을 다녀와서 문화기획 쪽 일을 하고 있었는데 일주일에 며칠은 꼭 심야택시를 타고 가고 주말도 없이 일을 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러니 건강도 안 좋아지고요. 아무리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한다 하더라도 이러다가 내가 먼저 죽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차라리 기획자로 쌓아온 경력을 가지고 문화적 기반이 부족한 지방으로 가서 새로운 문화적 토양을 만드는 일을 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큰 돈 벌지 않고 생계만 유지할 수 있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에요. 깊게 고민하면 시간이 지체될 것 같아 가족들이 사는 군산으로 이사를 했어요. 지금은 일단 서울을 떠난 이 안정감과 자유로움, 편안함을 즐기고 있고요. 문화기획사업을 군산에서 시작하고, 거창한 것은 못하더라도 일단 커뮤니티를 만들고 싶어요. 공동체를 만드는 거죠. 지금은 외국을 나갈 생각이 별로 없어요. 지금 이런 일을 하는 것 자체가 저에게는 또 하나의 여행이거든요. 삶 자체가 여행이니까요."
돈을 연료로 해서 같은 궤도만을 무한반복하며 돌아대는, 녹슨 기차 같은 도시 서울의 삶을 벗어난 고은초씨. 그녀는 군산으로 세계일주 만큼이나 긴 여행을 떠났다. '문화'를 통해 바쁘고 피로한 도시의 삶과는 다른, 넉넉하고 여유로운 삶이 지방에서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그녀는 여행으로 낡은 돈을 잃고 새로운 인생을 얻었다. 이 어찌 남는 장사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지막으로 여행서를 쓰고 싶은 꿈을 가진 사람들에게 경험자로서 조언을 부탁했다.
"제가 그런 조언을 할 수 있는 입장이 되는지를 모르겠네요. 음… 사실 책을 읽는 독자의 입장에서 말씀드리자면, 너무 많은 책이 나오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나무라는 소중한 자원을 낭비한다는 느낌도 들거든요. 글 쓰는 것 자체가 업인 작가 분들은 경우가 다르겠지만, 그냥 자기의 경험을 남기고 싶은 사람이 내 얘기를 반드시 책이라는 형태로 써야 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자기의 추억을 남기고 싶으면 블로그를 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객관적으로 봤을 때 책이 될 만한 내용이 명확하게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과시욕이나, 이런 것도 해봤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생각으로는 책이 안 나왔으면 좋겠어요. 그래도 굳이 말씀드리자면 저희 아버지께서 저에게 해주신 조언을 그대로 전해드리고 싶어요. 솔직하고 진정성 있게 쓰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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