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June 26, 2015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에 있는 질병통제예방센터(CDC) 전경. CDC 역학조사관 자리에는 의대 졸업생 중 최고 인재들이 지원한다. CDC 홈페이지
보건 당국의 '실수' '무능력' '판단 미스'가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 확산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근본 원인은 우리나라의 취약한 감염병 대응 체계에 있다. 예방의학 및 감염병 전문가들은 현 체계에 변화가 없으면 다른 신종 감염병 침투에도 방역망은 허무하게 무너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공짜 역학조사관’ 시대 끝내야

메르스 사태에서 가장 많은 비판이 쏟아진 대목은 ‘초기 대응 실패’였다. 이는 평택성모병원에서의 방역 실패를 뜻한다. 보건 당국은 이곳에서 격리 대상을 지나치게 좁게 설정했다. 평택성모병원에서 현장조사를 맡은 건 질병관리본부의 역학조사관이었다. 현장의 역학조사관이 어떤 판단과 보고를 했고, 본부에서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 명확하지 않다. 다만 분명한 건 그들의 판단이 엄청난 폭풍을 몰고 왔다는 것이다.

국내 역학조사관 제도의 구조적 취약함이 ‘부적절한 판단’을 낳았다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역학조사관 제도는 2000년 시작됐다. 초기에 지원자가 부족해 군 복무 대신 공중보건 업무를 하는 ‘공중보건의’로 역학조사관을 채웠다. 15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다. 전국의 역학조사관 34명 가운데 32명이 공중보건의다. 이들은 병역의무 기간이 끝나면 민간 병원으로 자리를 옮긴다. 역학조사의 전문성과 연속성이 확보되기 어려운 구조다.

천병철 고려대 의대 예방의학과 교수는 “정부에서 돈 한푼 안 들이고 값싼 인력을 쓰려고 공중보건의로 역학조사를 해왔다는 게 문제”라면서 “계속 훈련받고 경험을 쌓은 역학조사관들이 중앙과 지방에서 일할 수 있도록 제도를 만들어줘야 한다”고 지적했다.

미국은 의대 졸업생 가운데 최고 인재들이 질병통제예방센터(CDC) 역학조사관 자리에 지원한다. 국가가 역학조사의 중요성을 알고 높은 대우를 해주기 때문이다. 천 교수는 “이런 인재들이 각 주와 주요 도시의 보건 담당으로 퍼져 중앙에서 지방까지 역학조사관이 탄탄하게 채워져 있다”면서 “전염병이 파고들 수 없는 구조”라고 말했다.

“힘 있는 질병관리본부가 필요하다”

질병관리본부의 ‘허약함’도 여실히 드러났다. 질병관리본부는 2003년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사스) 사태를 계기로 태어났다. 본부장은 정부 부처 실장급에 해당하는 1급 공무원이 맡도록 돼 있다. 감염병이 유입됐을 때 역학조사와 대응 임무를 담당한다. 하지만 그에 따른 후속 조치를 의료기관이나 관계 부처에 ‘지시’하기는 어려운 위치다.

이번에도 질병관리본부는 사태 초기 해당 병원에 폐쇄 등 적절한 조치를 내리지 못했다. 상황 판단을 제대로 못한 탓도 있지만 과감한 조치를 취할 힘도 없다. 질병관리본부장은 중요한 결정을 하려면 보건복지부의 ‘재가’를 얻어야 한다. “병원명 비공개는 내가 결정했다”는 문형표 복지부 장관의 최근 발언은 이런 의사결정 구조를 보여주는 사례다. 한시가 급박한 상황에서 몇 단계를 거쳐야 하는 의사결정은 효율적 대처를 어렵게 만든다.

더욱이 우리나라는 의료체계가 민간 중심인 데다 공공의료기관과 보건소는 지방자치단체장 아래에 있다. 이 때문에 질병관리본부가 정보를 재빠르게 취합하기 어렵다. 지침이 전달됐을 때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도 힘들다.

오명돈 서울대 의대 감염내과 교수는 “질병관리본부장은 전쟁 준비를 위한 병사 훈련이나 진지 구축도 제대로 못하고 며칠 전의 전황을 갖고 전쟁을 지휘해야 하는 딱한 장수나 다름없는 실정”이라며 “전염병이 유행할 때마다 방역 당국이 뒷북 대응을 반복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고 꼬집었다.

이에 따라 질병관리본부를 청(廳)이나 처(處)로 승격시키고 인력·예산을 대폭 늘려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감염병이 발생했을 때 질병관리본부를 중심으로 대처하도록 시스템을 갖추자는 얘기다. 다만 질병관리본부가 ‘질병관리청’이나 ‘질병관리처’가 된다 해도 다른 정부 부처를 통제·지휘하기는 여전히 어려울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정보 공유 제도화해야

엄중식 한림대 강동성심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이번 메르스 사태에서 가장 아쉬운 대목으로 보건 당국이 초기 감염자 발생 병원의 정보를 의료기관에 제공하지 않은 일을 꼽았다. 사태 초기 보건 당국은 평택성모병원에서 메르스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철저히 숨겼다. 병원 환자들은 물론 다른 의료기관에도 병원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다. 이는 결과적으로 사태를 확산시키는 불씨가 됐다. 엄 교수는 “사태 초기부터 의사끼리는 정보를 공유해야 환자를 잡아낼 수 있다고 감염학회에서 공개를 요청했지만 시간이 오래 걸렸다”고 말했다.

보건 당국이 ‘의료기관 정보 공유’ 방침을 밝힌 뒤에도 실행에 옮겨지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준비된 시스템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감염병 예방과 관리를 위한 정보 시스템을 구축하자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중앙정부뿐 아니라 지자체도 감염병 관리에 투자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기모란 대한예방의학회 메르스위원장은 “현재 감염병 관리본부가 있는 곳은 서울과 경기도뿐”이라면서 “각 시·도에 감염병 관리본부가 있어야 사태가 터졌을 때 환자를 관리하고 다른 시·도와 공조할 수 있다”고 말했다. 현재 대부분의 지자체는 만성질환 관리 중심으로 보건 사업을 하고 있다.

권기석 기자 key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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